正言公宗中歷

太初가 二千年前이니 新羅開國初 東京인 慶州 瓢巖에서 誕降하신 始祖 諱<謁平>께서 朴赫居世를 國王으로 推戴하시고 攝政 數十年의 陰德으로 後孫이 蕃盛하여 瓢岩公 諱<謁平>39世孫인 諱<開>께서 本籍 慶州에서 分貫하시어 陜川李氏의 始祖가 되시고 新羅敬順王朝 翰林學士로서 爲國功臣 江陽君에 封하여졌다. 高麗가 建國되자 忠臣不事二君의 忠節로 敬順王이 昇遐하자 江陽君과 夫人金氏와 딸이 함께 順從하여 忠 孝 烈을 한 집안에서 이루셨다. 그 후 文章과 忠節이 百世의 師表라 稱頌하여 圃隱, 牧隱 兩先生의 狀啓에 따라 文忠公으로 謚號를 내려 주셨다. 그 후 江陽君(陜川郡)龍洲面 月坪里 求理洞 望月山乾坐 上下墳에 安葬 되셨다.
 

司直公의 後孫들은 江陽君 陜川李氏始祖 以後 14派中 典書公派의 後裔들이며 典書公派祖 諱<守全>은 陜川李氏 始祖 諱<開>의 10世孫이시다. 始祖의 16世孫이며 派祖의 6世孫이신 諱<權老>께서 電算入力處理된 本司直公譜의 元祖이시다.

 司直公의 後孫들은 西部慶南地域을 奠居地로 繁盛한 20世孫<承文>의 後孫들이다. 이중에서도 族譜電算化 事業을 主導한<正言公宗中>은 21世孫 諱<淸>城川家門의 24世孫 諱<廷虎> 次男 諱<馨>의 子孫들이 正言公宗中을 이루어 山淸新安의 省墓祭禮를 뒤이어 河東 古田 城川「追遠齊」奉祝祭禮를 지내며 宗中의 啓訓을 지켜오고 있다가 時代變遷에 副應한 葬墓事業의 先驅的改革과 本貫族譜의 電算化 作業을 着手하게 된 것이다.

  氏族文化의 急進的 變遷과 氏族들의 慾求에 副應할 수 있도록 文明의 利器를 活用하여 客觀性과 信賴性이 있는 個人의 情報를 合理的으로 記錄保存하여 모두에게 이롭게 하려는 意志들이 가난함을 이기고 淸廉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虛張聲勢가 아님을 보이는 實踐的 行動意識의 아름다움에 感銘하여 末端宗中의 元老로서 작은 이들의 큰 氣慨를 稱頌하고 자랑하고싶어 이렇게 自畵自讚의 吐를 옮긴다. 


처량하리 만치 가난하고 正直한 司直公의 末端인 正言公宗中이 韓族의 끈기를 되살려<追遠齊>의 海龍을 上樑했던때는 植民의 激浪 속에서 氏族門中은 勿論, 民族의 魂까지 抹殺하려했던 倭政末期인 甲申시월열하루 甲午巳時이다. 當時 江陽君32,33,34世孫들은 倭警의 눈을 피하여 숨어서 다듬기를 2年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물로 허기를 채우며 深夜의 도깨비불 같은 초롱불 밑에서 받침돌, 석가래, 창호지, 마루판 하나 하나를 손톱 밑에 피멍이 터지도록 손으로 다듬어 만드신 螢雪의 忍苦가 2年이며, 先親들의 友愛로 結集된 愛國․愛族․獨立魂의 結晶이었던 正言公宗中의 그때의 凝集었던 氏族魂을 지금의 초라한<追遠齊>가 알려주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제 先代의 淸廉한 共同얼을 되새겨 비루한 洞窟을 脫皮하여 內實있고 未來를 豫測할 수 있는 陜川李氏一族의 情報管理는 時代的 輿望이며 共同의 義務이며 責任이 되었다. 司直公譜를 電算化 하면서 미쳐 생각지 못했던 不足한 部分은 隨時補正하여 餘他의 情報와 比肩할 수 있는 正直한 記錄이 되도록 가꾸어야 하며, 派譜는 勿論 大同譜의 電算化도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衷心으로 바라는 마음을 각 門中에 傳하여, 統一된 信念의 意志가 모두 積極參與함으로써 凝集된 意志의 마라톤이 決勝點까지 무사히 到着할 수 있기를 祈願한다.


庚辰仲秋節於鄕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