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의 화신
 

   이본 땅에 최근 퇴계선생의 현창비가 세워졌다고 하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나는 지난 6월 제18회 한 일 중 국제 퇴계학 학술발표회에 참석하여 일본 후쿠오카현 카스가 시의 正行寺 경내에 우뚝 선 이퇴계선생의 현창비를 보고 왔다.

   건립 시기는 2003년 4월, 건립자는 한국측 대표로서 서울 남하산성 望月寺 주지 性法三藏法師와 일본측 대표로 淨土眞宗 정행사 주지 다케하라 지묘(竹原知明), 책임 역원 다이가레이따로(大賀禮太郞), 호소가와 가요꼬(細川佳代子)이다.

   현창비가 세워지게 된 연유는, 서울의 말월사와 일본의 정행사 간에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던 바, 양측 사람들 사이에 역사상 이퇴계 선생이 일본 유학 중흥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을 공동 인식한 데서 비롯 되었다.

   유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의 현창비가 불교 사찰인 정행사 경내에 세워지게 된 데에는 연고가 있었다. 서울의 망�횔� 주지인 성법니그님은 퇴계선생의 15대손인데, 소싯적에 일본 동걍 대학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중이 되었다. 그 후 망월사 주지가 되고 나서, 일본에 있는 사찰과 교류가 잦았다.

  그간에 선조인 퇴계 선생이 유교 학자로서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유교를 일으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특히 명치유신 때, 교육헌법인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만들 적에 퇴계선생의 사상을 근본으로 작성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학덕높은 선조-퇴계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땅에 선생의 현창비를 세우는 것이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제의하였던 바, 일본측 사람들도 이미 퇴계선생이 일본 유교 중흥에 절대적 공이 있고, '교육칙어'에 선생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터이었으므로, 이 제의가 선뜻 받아들여져 결실을 보게 되었다.

   당일 학술 발표 회의장은 아악 공연장과 법당을 겸한 곳이었다. 한국측에서 20여명, 일본측에서 약150명이 참석 했는데, 아악당 회원들이 가장 많았다. 다케하라 주지는 퇴계선생의 현창비를 세우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고, 또 유교와 불교는 표리일체이며, 퇴계선생의 학문은 16세기 말에 일본에 전해져 당시 에도(江戶)시대의 윤리 도덕의 주류가 되었고, 명치시대 국민 도덕 교육의 근본사상으로 정착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이 가르침을 계속 전해 나갈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이가(大賀)씨는 부산의 범어사에 다녀온 이야기도 하면서 일본 아악과 불교와의 관계를 이해시키려고 애쓰고, 한 일 간 친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여성대표 호소가와(細川)씨는 1990년초,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호소카와 모리히로'씨의 부인이라고 하기에 더욱 관심을 끌었다. 정행사의 �e심 역원으로 현창비 건립에 큰 역할을 했다. 달일 인사말도 깔끔하였거니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발표회에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을 하고 있어 고개가 숙여졌다.

   해마다 3개국을 순회하면서 개최되는 국제 퇴계학회가 올해 일본에서 열렸는데, 때마침 '교과서 왜곡문제'와 '독도문제'로 양국간 갈등 상태에 있는 시점이어서 약간 씁쓸한 감정을 갖고 방문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양국간의 친교는 유지하면서 상호간이해 증진에 계속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해마다 학술 발표에 참석하다보니, 이미 얼굴이 익은 사람들이 많다. 일본 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대개 친절하고 정직하여 좋은 사람들이란 인상을 갖게 되는데, 민족대 민족의 관계가 되면 입장이 달라지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대화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하여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서로간에 친하게 지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정부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딴 얼굴이 되어 버리니, 이해가 안된다.

   나는 이국 땅에 세원진 퇴계선생 비석에 참배하고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퇴계선생은 500년 전 우리나라 유교 학자가 아닌가. 그리고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근세에 와서도 36년간 우리국권을 탈취, 지배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일본은 우리에게 원한의 나라이며, 일본 또한 우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퇴계 선생의 현창비가 이국 땅 일본에 세워졌으니, 이는 무슨 힘의 작용이라 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퇴계선생의 15대 후손인 망월사 주지 성법니스님의 先代의 업적을 현창하고자 하는 강렬한 숭조심이 씨앗이 되었다 할 것이고, 둘째는 한국과 일본 두 사찰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자매결연의 힘이 받쳐준 역할 또한 컸다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힘은 학덕의 힘이 아니었겠는가!

   정행사 다케하라 주지의 말처럼, 퇴계선생은 16세기말 일본에 유학을 확실하게 전하고, 그들의 '교육칙어'에 까지 선생의 사상을 담았으니, 그 후 이 가르침으로 교육받은 일본인은 모두가 은연중 선생의 정신적 영향력을 받고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망월사 성법니스님이 선생의 현창비 건립을 제안했을 때, 선뜻 동의하게 된 것은 자가나라에 위대한 학문을 전해준 은인의 '현창비 건립'에 바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케하라 주지가 "우리는 퇴계선생의 비석을 쳐다보면서 나날이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고 한 그말이 결코 입에 발린 말이 아님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으니, 학덕의 힘은 이처럼 위대하였다.

   우리 일행은 비석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 묵념을 올렸다. 나는 비석을 우러러 보는 순간 '이것이 그냥 돌이 아니라, 퇴계선생의 화신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1570년 타계하신 산생이 일본인들에게 기르침을 주기위해 다시 살아나 이곳 정행사 마당에 우뚝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되었다.

   퇴계 선생은 430년 전, 70평생을 살고 서거하였으나 그 학덕은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일본인 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비석으로 회신되어 정행사 뜰에 나타나셨으니 인생은 짧고 학덕은 길다 하겠으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과 국제 친선의 힘 또한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역사왜곡 문제로 한 일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이 시점에 두 나라 사찰간 화합의 결실인 퇴계선생 현창비 건립은 양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